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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난거

국민의 위대한 움직임, 역사적그날19, 프리한19

by 로토루아8 2019.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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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5월 18일 가슴아픈 역사적 그날이었죠.

대한민국 국민들의 헌신이 이루어낸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 올해로 39주년을 맞은 광주 민주화운동.

민주화 꽃을 피우기 위한 전 세계 시민들의 피, 땀, 눈물!

국민의 위대한 움직임, 역사적 그날19

민주화 꽃피운 전 세계의 역사적 그날을 시대순으로 재조명함.

카리브해의 섬나라인 도미니카 공화국!

그속에 서려있는 가슴 아픈 역사..

1930년이후로 도미니카 공화국을 무력으로 지배하고 국가 농경지의 약 3분의 1이 그의 사유재산임.

폭력 조직과 손잡고 반체제 세력들을 살해함.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아이티계주민 약 3만명을 학살하고 악랄한 인권유린을 자행함.

한 파티장에서 시작된 세 자매와 라파엘의 악연!

세자매중 미네르바 미라발을 성추행한 독재자 라파엘.



그리곤 독재자 라파엘의 뺨을 때린 그녀.

독재자 라파엘의 추악한 복수가 시작됩니다. 세자매의 아버지를 끔찍하게 고문을 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죠.

아버지죽음, 독재에 대한 울분으로 반독재 운동을 시작합니다.

비밀결사조직 마리포사, 나비를 만들어 독재의 잔혹한 실정을 폭로한 선전문을 제작하고 배포함

무력 탄압에 맞서기 위해 총기수집까지하고 보복성으로 세 자매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수차례 고문까지..

독재에 맞선 세 자매의 용기있는 저항!

독재자 라파엘의 공포 정치를 두려워하던 국민들을 일깨우기 시작하자 라파엘은 경찰에게 세 자매 처치를 명령.

결국 1960년 11월 25일 무참히 살해된 세자매..

그런게 경찰은 그녀들의 죽음을 교통사고로 위장을 함. 이에 도미니카 공화국 국민들의 분노가 대폭발.

결국 세 자매가 살해된지 6개월뒤 반대 세력에게 암살당한 독재자 라파엘.

마침내 31년의 독재정권이 막을 내린 도미니카 공화국.

그 나라의 화폐에 어떤 위인이 들어가는지가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도미니카 공화국 200페소 화폐에 새겨진 세자매!

1963년 6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한장의 사진이죠.

한 스님이 불길에 휩싸인 사연.

1885년에서 1954년까지 약 70년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은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프랑스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독립을 막으며 일으킨 인도차이나 전쟁을 휴전한 협정이에요.

1955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응오딘지엠이 베트남 공화국을 선포함.

남베트남 대통령이 된뒤 자유주의와 반공정책을 시행. 그런데 응오딘지엠 정권은 자유주의가 아니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기 위해 겉으로만 

표면상으론 자유주의를 지향 하지만 실상은 독재정권임.

언론 검열, 지식인 탄압, 종교탄압. " 프랑스 식민 지배 시절보다 더하다"고..

" 불교가 공산주의를 부추긴다!" 대놓고 불교계를 차별.

1963년 극에 달한 응오딘지엠 정권의 횡포

석가 탄신일 봉축 행사까지 금지하자 항의 시위를 한 스님들.

경찰을 동원해 무력 진압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허울만 있는 자유주의에 이어 종교의 자유마저 박탈함

1963년 6월 11일 호찌민 거리 한복판에서 소신공양을 함

소신공양이란? 자신을 불태워 부처에게 바친다는 뜻의 불교용어에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자유를 향한 열망을 보여준 스님

제자들에게 남긴 스님의 유언

고통속에서 무려 10분을 버티고 뒤로 넘어진 스님.

화마도 꺾지 못한 스님의 고귀한 의지.

스님의 숭고한 희생에 존경을 표한 베트남 국민들..

사람들을 분토케한 권력층의 충격 망언.

사실상 퍼스트레이디였던 다담뉴 쩐레쑤언의 언론 인터뷰

포악한 드래곤 레이디로 불리며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음.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된 스님의 희생.

1963년 11월 즈엉반민 장군을 중심으로 쿠데타가 발생. 성당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어 총살로 최후를 맞이한 독재자.

독재에 맞선 스님의 뜨거운 의지...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제 19회 멕시코 세계 스포츠대회 열흘 전 1968년 10월 2일 끔찍한 대참사가 발생합니다.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 광장에 만여명의 인파가 운집.

제2차 세계대전 후 성장주의 정책과 경제발전을 이룬 멕시코는 중남미 최초로 세계 스포츠 대회를 개최함.

하지만 그안에 서려있었던 민중의 고통

부정부패 물러나라! 집회의 자유를 달라!

시위 도충 광장을 에어싼 탱크부대는 시위대에게 무자비 발포를 함.

심지어 학생들과 시민들을 공격한 무장 헬리콥터까지. 하지만 모진 탄압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자유 열망.

68운동으로 1968년 전 세계에 분 학생, 시민운동, 특히 프랑스, 서독, 미국이 나서 정부부패와 권위주의에 맞서 시위함.

자유를 향한 국제적 움직임에 적극 동참한 멕시코.

큰 권력을 시민의 힘으로 올바르게 교정했던 의미있는 해라고 봐도 되겟네요.

2000년 민주적 국민 투표로 결국 제도 혁명당이 패배를 함.

독재정권에 맞서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이루어낸 민주화 68운동

1980년 8월 폴란드의 한 조선소에서 파업을 선언한 노동자들은 파업의 직접적인 원인이 식료품 가격인상때문이었어요.

전세계에 분 오일 쇼크로 재정이 어려워진 폴란드는

결국 별다른 통보없이 물가를 인상함. 돼지고기의 공급가격의 무려 80%나 상승함.

결국 생계가 막막해지자 거세게 반발한 노동자들.

돼지고기 인상이 왜 심각한 문제인지 폴란드에서 식사를 해보면 알수 있는데 폴란드인에게 돼지고기는 주식으로 우리나라 쌀, 김치와 등급이에요.

이때 수많은 노동자중 가장 큰 목소리를 낸 이는?

10년전 1970년 12월에 발생한 노동자 무력시위가 12월 사건이에요.

당시에도 생필품 가격인상으로 노동자들의 분노는 커졌고 시위도중 정부의 무력 진압에 40여명이 사망함

당시 참혹한 역사를 두눈으로 목격한 바웬사..

사실 공산주의는 노동자의 나라인데 노조를 탄압하는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자유 노조가 중요한 것.

공산주의체제에서 국가가 만든 노조에 모든 노동자가 의무 가입을 해요

노조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국가의 지령만을 전달함

노동자의 나라지만 국가에서 공인한 노조 외에 다른 노조를 만드는게 공산주의가 아닌 사회보다 훨씬 더 억압받는 거죠.

공산당이 일당 독재를 해서 다른 노조 만드는걸 허용하지 않았겠네요

이후 전국적으로 퍼진 자유노조의 바람. 하지만 1981년 12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하지만 결코 막을수 없는 자유노조에 대한 열망...!

결국 정부는 자유노조 합법화논의를 제안함. 1989년 6월 정부, 노조, 지식인 대표등 55명이 모여 원탁회의 개최함

폴란드 최초 하원 자유 선거를 실시했고 자유노조가 상원 100석중 99석 하원 161석 전석을 차지함.

1990년 폴라드 최초로 민주주의 선거를 실시

모든사람이 자유를 원한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는 자유의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다.- 러흐 바웬사.

2016년 11월 사망한지 28년만에 고국 필리핀으로 돌아온 한 남자.

그런데 국립묘지 안장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인 사람들. 고인이 되어서도 사람들의 원성을 사는 그.

1965년 51.9%의 득표율로 제 10대 대통령에 당선됨

부정부패 척결과 정부 개혁을 추진 경공업 육성으로 필리핀 경제 발전에 기여하고 일본에 이어 제2의 아시아 경제 대국으로 등극함.

그런데 경제 정책 실패와 부패로 필리핀 경제는 추락함

마르코스의 실정을 비난하며 폭동을 일으킨 공산세력

1972년 그러자 계엄령을 선포하며 군부 독재를 시작함.

반대 세력들에게는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함.

학생, 종교계등 독재 정구너에 분노한 각계각층의 국민들

1986년 2월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 야당 대표인 강력한 대선 후보였던 코라손 아키노는 마르코스의 정적인 베니그노 아키노 2세의 아내였음

1983년 남편이 암살당하자 유지를 이어 정치 시작했고 당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코라손의 당선이 유력함

그러나 마르코스 정부는 개표과정에서 각종 부정 수단을 동원했죠

결국 필리핀인들의 분노가 대폭발했고 

꽃과 노란 리본을 달고 비폭력 시위로 투쟁 4일간 이어진 시위에 군부마저 시민혁명에 합세함.

결국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 독재자 마르코스.

약 21년 독재정치를 무너뜨린 피플파워.

민중의 위대한 힘을 보여준 시민혁명.

1986년 필리핀 바른정부위원회는 마르코스 일가의 비리조사결과

마르코스 일가의 부정은닉 재산 규모는? 1970~1980년대인데 당시 50~100억달러로 약 11조원으로 추정된다고함.

이멜다가 에어컨 50대를 가동한 이유는 한여름 날씨에 모피 코트를 입기 위해서 였다고..

끝나지 않은 마르코스 일가의 막장행보.

여전히 호의호식하는 이멜다와 자녀들.. 

독재시절을 황금시대라고해 모두를 분노케 하기도함.

맨 몸의 한 청년이 탱크를 막고 서 있음!!

하지만 부정부패, 실업 문제등 인민들의 원성이 높았죠.

그런데 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이 실각에 이어 사망하자 1989년 4월 그를 추모하기 위해 톈안먼 광장에 모인 사람들..

그리고 부정부패 척결을 비롯한 7개조를 요구함

하지만 군부는 시위대를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하고 결국 계엄령까지 선포해 무력진압도 불사하겟다고함.

불굴의 시위대인 학생들은 단식 농성에 돌입.

1989년 6월 3일 톈안먼 광장에 쳐들어온 30여대의 탱크와 장갑차는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발포와 무자비한 탱크 진압까지함

중국내 외신기자들을 통해 알려진 충격사건이에요.

톈안먼 민주화 시위가 비록 실패했지만 남긴 의미는??? 

하지만 지금까지도..강경진압을 인정하지 않은 중국. 이후 중국내 민주화 바람에 위기감을 느끼고

지식인들이 활동 반경을 넓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전세계가 안타까워한 중국의 인권 탄압사건..

2010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는데 수상을 두고 국제 사회에서도 기대했던거 같아요

중국이 국제적 체면 때문에라도 풀어주지 않을까..

하지만...석방불가!! 비록 빈자리였지만 그의 위대한 공로는 빛났습니다.

높이 약 3.6m 폭 1.2m 냉정과 분단의 상징으로 무수한 목숨을 앗아간 베르린 장벽.

1989년 11월9일 드디어 무너진 철의 장막. 지금도 생생한 역사적 순간이죠.

이것이 역사를 바꾼 국민들의 위대한 움직임이에요.

1989년 10월 한 동독 전문가에 따르면

1980년대말 당시 동독 공장은 폐허상황이었고 동독의 제조업 생산력은 서독의 25~30%임

시민들의 삶은 피폐 그 자체였음.

그러던 중 동독 시민들의 불만을 폭발시킨 사건. 부정투표!!

그이유가 비밀 투표를 빙자한 공개투표였기 때문이에요.

보통 당시 기표소는 두곳인데  비밀투표가 이뤄진다는 명분에 불과했음

비밀 투표를 하러 들어가는 인들은 지켜코고있다고 곧바로 명단에 오름.

독일 통일을 이끌어 내기 위한 월요 시위를 준비.

동독정부 수립 40주년 기념 열병식 이틀뒤인 10월 9일

평화적인 반정부 시위를 벌인 수만여명의 시민들..

민중의 함성이 최고조에 달한 11월 4일 동독 독재 정권에 맞선 100만여명의 비폭력 투쟁.

1989년 11월9일 마침내 무너진 베를린 장벽.

베를린 장벽이 청계천로에 있어요. 2005년 독일 베르린시가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서울시에 기증함.

계엄 사령관시절 토지개발, 경계 5개년 계획등 경제발전에 지대한 노력을 함.

1986년 84.1%의 득표율로 제9대 대통령에 취임함.

에르샤드 정권의 실상은 유명무실 그자체였음

1986년 정치적 기반이 될 자티야당을 창당 이후 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됨

투표율을 조작한 부정 선거 혐의와 함께 독재정치까지..

1988년 수력발전소 건설을 위해 하루 아침에 원주민을 추방하고  1989년 7월 대통령 임기를 5년 연임제로 개헌.

1990년 10월 수도 다카에 모여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

이때 민주화 운동의 중심이 된 두여인이 있어요!

에르샤드 정권 퇴진에 나선 칼레다와 셰이크

더큰힘을 얻은 시민들도 민주화 운동에 동참을 했고 야간통행 금지령등 시민들을 탄압한 정부.

안타깝게도 백여 명의 시민들이 진압과정에서 사망을 함.

하지만 군부의 잔혹한 총칼도 막지못한 뜨거운 민주화 물결 1990년 12월 4일 마침내 권력에서 물러난 독재자 에르샤드

1991년 방글라데시 최초로 자유 경선을 시행

결국 막을 내린 약 10년간의 군부독재. 독재정치를 물리친 위대한 우먼 파워!

여성인권이 열악하기로 유명한 이슬람 국가에서 두 여성을 주축으로 민주화 운동을 해낸게 대단하네요.

100년도 채 되지 않는 미국, 유럽 여성의 참정권. 선진국에서도 보기힘든 여성 주축의 민주화운동

이슬람 국가중 여성의 정치력이 돋보이는 방글라데시.

그런데 평화롭던 아침 식사 중에 한 무리가 닥쳤는데..

구소련 8월의 구데타 의 서막..!!

쿠데타의 원인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개혁 개방정치에 불만을 가진 것.

8인의 공산당 보수파들의 국가 비상사태 위원회를 결성했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건강상 문제로 물러났다며 야나예프부통령이 대통령직을 대행한다고

소련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됨

선포이후 모스크바에 군 차량을 대거 동원해 군인들도 주둔

고르바초프의 행방에도 온갖 소문이 무성했는데

쿠데타에 대한 비난과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위해 크렘린 궁 앞 탱크에 올라서서 연설을 시작함.



그의 뜨거운 연설에 시민들도 하나둘 거리로 나서고 온몸을 던져 탱크를 막아내기까지함.

시위물결은 시베리아, 레닌그라드의 노동자들은 전면 파업

당시 시위 인파는 무려 100만명에 육박함. 결국 쿠데타를 진압한 시민들의 힘.

시대가 바뀐거죠. 공산주의 강경파들은 과거로 돌아가면 지지를 받을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죠.

많은 이들이 개혁 정치를 지지한 이유가 러시아가 땅이 넓고 천연가스 매장량이 많아서 결코 가난할 수 없는 나라에요.

그 수많은 자원과 돈을 군비경쟁, 우주선 개발에만 투자. 그래서 치약도 제대로 만들줄 몰랐다고해요.

불균형한 나라 경제에 서민들이 고통을 분담함.

예상과 다른 전개에 무너진 쿠데타 지도부

약 50시간 만에 연금에서 해방되어 돌아온 고르바초프

" 굴하지 않은 국민ㅇ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이제 모든것이 제자리를 찾던 바로 그때 8월 쿠데타 실패후 입지가 좁아진 공산당

공산당의 상징인 스탈린과 제르진스키동상을 철거

공산정구너의 몰락을 상징하는 순간이죠.

하지만 개혁의 아이콘에서 구시대의 상징으로 전락함.

입지하락의 이유가 1985년 개혁 개방 선언 당시 경제발전을 기대했으나 6년간의 개혁 정치 결과는 끝없는 경제침체였죠.

개혁이후에 경제성장도 뒷받침 되지 않으면 시민들에겐 의미기 없는거같아요.

형편이 그대로면 시민들은 다시 분노할 수밖에 없는 거죠.

격동의 8월 쿠데타 사건 이후 공산당 서기장직에서 하야함 옐친은 소련 해체 및 독립국가 연합을 창설

1991년 12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붉은 제국 소련의 최후..

1990년 2월 1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빅터 버스터 감옥.

한사람의 석방을 보기위해 세계 언론과 군중이 운집. 무려 27년만에 석방된 그의 이름은..

당시 백인 정권의 흑인, 유색인종 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는 미국의 짐 크로 법에서 유래된 정책으로

미국에서 노예가 해방된 후에 흑인에게 시민권을 줘야 하니까 정부가 명분을 만든거에요.

인종차별의 예로 흑인전용과 백인 전용으로 분리된 수도꼭지 

결코 동등하지 않았던 흑인과 백인의 삶. 

짐 크로 법과 닮은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스위스 백인 아버지와 남아공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트레버 노아

아버지와 손을 잡고 가다가 경찰이 오면 손을 놓고 반대쪽으로 가야 하는거에요.

그이유는 백인과 흑인들의 인도가 다름 트레버 노아는 외모가 흑인이었던 거에요. 

아파르트헤이트 법에서 백인과 흑인의 결혼은 불법

자신의 출생 자체가 범죄라는 슬픈 의미..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의 잔인한 인종차별 정책이죠.

흑인 거주지역 반투스탄 구역에 흑인들을 강제이주시키고 흑인들은 신분증명서 소지가 필수인 통행법을 제정.

인간이 아닌 인간 취급에 삶이 짓밟힌 흑인들..

흑인들과 함게 아파르트헤이트에 투쟁을 한 넬슨 만델라.

하지만 정부는 비폭력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했고 약 60여명 사망하고 수백명이 총상을 입음..

민족의 창 조직 결성후 무장 투쟁을 시작한 만델라

그런데 1976년 흑인 인권의 새 역사를 쓴 사건이 발생함

정부는 흑인 학교에 아프리칸스어 사용을 강요.. 당시 아프리칸스어는 주로 남아공백인들만의 언어였는데

아프리칸스어 교재를 불태우고 평화행진을 시작함.

하지만 경찰은 학생들에게 최루탄과 실탄을 발포. 

소웨토시 흑인 전체가 거세게 반발했지만 초등학생을 포함해 1000여명을 학살함

무자비한 학살에 짓밟힌 어린 생명들..

남아공에 쏟아진 전 세ㅖ의 비난과 여론압박. 결국 1990년 2월 27년만에 만델라 석방.

전 세계를 감동하게한 흑인들의 투표행렬..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가 당선.!

만델라와 함께 일했던 정부 관계자가 전한말은 대통령 당선후 백인들도 기용한 만델라.

같이 인종 차별 반대 운동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를 탄압하던 사람을 기용햐나고 물었대요.

보안문제뿐 아니라 보복도 우려할수 있는 상황인데..

진정한 화해와 용서를 보여준 만델라..

정말...큰사람이네요!


<출처: tvN 프리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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