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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난거

차이나는클라스, 신병주 교수의 조선의 전염병 이야기.

by 로토루아8 2020.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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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힌트?!

전 세계적 화제인 드라마 킹덤의 그약초. 사람이 좀비가 되는 역병을 퍼뜨리는 가상의 약초인 생사초.

나박김치, 고양이와 관련된 주제는?

중종때 편찬한 의서에 보면 쉽게 전염병을 물리치는 처방법이 나와요.

나박김치 국물을 마시라고 처방. 두번째 힌트인 고양이 그림은 전염병 예방에 쓰인 부적이에요.

고양이와 관련된 내용은~ 잠시후에~

코로나19로 고통받는 전 세계. 놀랍게도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전염병 대응법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

오늘의 주제는

조선에도 K-방역이 있었다?

전염병 시대에 리더의 중요성을 보여준 사례임. 조선 왕들이 발휘한 리더십은?

세종도  피할수 없었던 전염병. 지금과 닮은 대책도 실시했음.

조선시대별로 유행했던 전염병. 그리고 왕들의 대책을 소개할 예정임.

우리가 잘 몰랐던 사실. 조선 건국에 영향을 미친 전염병.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그 네가지 이유. 고려말 요동 정벌에 반대한 이성계.

그이유로 내세운 4불가론.

첫째. 작은나라가 큰 나라를 칠수 없다. 고려가 명을 칠수 없다는 것.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할수 없다. 당시 군사들은 대부분 농민이에요.

고려말 왜구들이 들끓던 시기로 셋째, 왜구가 빈틈을 노릴수 있다.

여름철에다 장마철임. 넷째,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그리고 전염병 창궐 우려가 있다.

무작정 군사를 동원한다면 전염병으로 먼저 쓰러질 수도 있죠. 빨리 군사를 돌이켜야 된다.

4불가론에서 시작된 회군 결정은 조선건국으로 이어진다.

최근 약 5년 주기로 발생하는 전염병.

조선시대 전염병 창궐 주기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전염병을 부르는 명칭도 다양해요.

역질, 여역, 온역, 악병등. 무려 1천 400여건이 기록됨.

결코 전염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선.

누구의 책임이 가장 컸을까요? 비만 안와도 임금 탓한 조선. 전염병도 임금 때문이 아닐까요?

조선 시대 전염병 책임의 주체는 왕이죠. 병이돌면 왕을 원망한 백성들.

대부분 왕이 직접 나서서 

앞서서 자신을 탓했던 조선의 왕들.

현종실록을 보면 나와있죠. 특명! 백성을 구하라.

조선전기 전염병과 세종의 리더십.

성군인 세종대왕 재위시절 1418~1450년.

유행했던 전염병인 악병. 그만큼 흉악하게 느꼈던 전염병. 악병은 뇌수막염 계통으로 추정됨.

전염병 대응 체계 구축에 나선 세종. 전문 의학자들을 양성하기 시작.

유효통, 노중례, 박윤덕 등을 뽑아 의학서적 집필을 지시함.

중국산 약재를 활용한 처방법에서 벗어나 우리땅에서 나는 약재, 향약을 활용한 처방법을 제시.

일반백성들 입장에서도 구하기 쉽고 책을 널리 보급했던 세종.

혜택을 백성이 받을수 있게!!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던 의료기관. 1. 내의원.

내의원은 국왕의 건강을 관리. 조선시대 왕실 전속 의료 기관이었던 내의원.

청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가 있어요.

조선의 의료기관 두번째는 전의감.

전의감은 관리들의 진료 담당하는 곳임. 약재 제조 및 배급도 담당.

3. 혜민서.

혜민서는 백성 진료를 담당. 의약을 괄리하고 의녀들을 양성하기도 했던 혜민서.

빈민을 구제하고 치료한 기관. 

조선의 의료기관 4. 활인서.

사람을 살려내는 기관인 활인서.

무료로 병을 치료하고 약제를 나눠줬던 의료기관.

활인서가 중요한 게! 전염병 환자를 격리했던 곳이에요.

도성안으로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위해 동, 서활인서에 나눠 전염병 환자를 치료했던 조선시대.

또 하나 중요한 의료기관. 서민들을 치료한 기관이 있었어요.

제생원에서 유래한 동네 이름은?

서울에 있는 동네 이름으로 현재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계동.

제생원이 있던 동네가 제생동이에요. 사람들을 통해 잘못 전해지게 된 지명.

계생동이라고 부른거에요. 제생동이 계생동이되고 기생동과 비슷하다. 생자를 빼고 계동이 된거라고하네요.

지명에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

삼청동에 얽힌 역사로 삼청성신이란 도교신이 있어요.

도교신을 모신 삼청전이 있던 동네가 삼청동이에요.  평창동 아시죠?

조선 후기 설치된 군영 총융청. 

총융청 군량을 보관한 창고가 평창이에요. 평창이 있었던 곳.

염창동의 유래는? 서울의 서쪽에 위치한 염창동은 서해에서 채취한 소금 보관창고가 있었던 곳임.

세종에게 밀려 쫓겨난 맏형인 양녕대군

방배동. 등 돌려 떠났던 자리란 뜻임.

동네명에 얽힌 사연을 많이 알면 역사를 공부하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함.

세종이 얼마나 방역 대책을 잘하셨는지 사례를 몇가지 살펴보겠습니다.

1437년 굶주린 백성들을 모아 식량을 제공한 세종.

무료 급식소마다 1000여명이 모여 주린 배를 채웠는데 봄이 되자 급식소를 휩쓴 전염병.

집단감염 사례인거죠.

일찍이 집단 수용의 문제점을 파악.

근본적인 원인을 차단하라. 7년뒤 세종이 내놓은 조치.

질병을 얻은 사람은 섞여 살게 하지 말라.

세종의 대책 1. 전염병 환자를 격리.

발생했던 또 다른 문제는 무연고 시신을 방치한 것. 커졌던 전염병 확산의 우려.

뉴욕에서 시신을 매장할수 없어서

그래도 우리 세종은 세종다운 대책을 지시함.

시신매장 담당자를 지정. 시체를 매장하는 승려가 매골승이에요.

세종의 또 다른 전염병 대책.

감찰단을 보내요. 관리들이 백성을 잘 돌보는지 수시로 확인했던 세종.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사람들은 책임자를 엄중 문책함.

굶어 죽기 직전의 눈먼 여종을 발견.

관리의 보고를 받는 세종.

책임자를 문책하고 쌀과 콩 한석을 내려라!

세종의 대책. 감찰 및 사후처리를 지시함.

또 한번의 사례가 있는데 역질에 걸린 사람은  노역을 면제해줌.

세종의 대책, 역질에 걸리면 노역을 면제해줌.

전염병 처방법을 기록해 놓음. 전염병 매뉴얼을 배포함.

전국에 방을 붙인 세종.

이것보다 더 많은 내용이 나오는데 비과학적인 처방도 있지만 상당히 과학적인 내용도 있죠.

저때가 1400년도인데 병원인, 바이러스, 세균에 대한 지식이 없을때죠.

세종의 대책은 격리지시, 시신매장, 매뉴얼 배포.

보건까지 섭렵했던 세종대왕.


세종이란 왕이 관리들 입장에서 보면 너무 일을 많이 시키니까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좋은 상사는 아니었던 세종

백성에게 꼭 필요한 전염병 대응책을 제시한 세종.

조선 초기 전염병 대응 시스템의 큰틀을 마련하게 된다.

무사히 전염병을 극복하고 난 뒤 효자상을 수여한 세종.

역질이 유행하면 도망가잖아요. 어머니를 극진히 돌본 효자가 세종에게 효자상을 받은 기록.

지금도 목숨걸고 환자 돌보는 의료진분들.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분들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도 최전선에서 코로나19와 사투중인 의료진분들. 온 마음을 다해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세종 다음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2년 3개월의 짧은 재위 기간을 지냈던 문종.

문종은 세자생활만 29년을 했고 아버지 세종을 잘 보좌했던 문종. 세종때 유행했던 전염병이

천도논의까지 있었다는 기록이 문종실록에 나와요.

수도이전까지 논의했던 상황임.

심각한 고민에 빠진 문종은 1451년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함. 약사여래에 의존하는 수륙재를 지내고.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영혼을 달래는 불교 의식인 수륙재.

역질이 돌때 지내던 국가 제사인 여제. 고스란히 드러나는 문종의고민.

본인도 미신인 것은 알지만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고안해냈던 방법임.

이에 대한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던 문종. 여기서 약사여래가 나왔잖아요.

부처님도 한 분만 있는게 아니에요.

천염병이 돌면 찾았던 약사여래. 부처님마다 조금씩 자세가 달라요.

약사여래상의 모습은?

수륙재 여재.

전부 비과학적인 대책뿐일까요?

마치 불이 섶을 얻음과 같다. 가까이 있으면 계속 번지는 전염병.

더 번지지 못하도록 차단을 지시함. 문종의 비상대책회의에서 나온 결과. 비과학적이지만은 않다.

문종때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격리지침을 내렷던 조선의 왕들.

뒷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과거시험 합격 인사도 금지.

합격자 축하 인사도 다 사양한다는 것.

지날달 실시한 공기업 채용시험.

조선후기 정약용도 거리두기를 강조함.

비말 전파에 대해 알고 있었음.

학교 식당도 일자로 자리배치하죠. 요즘.

공항에서 김장비닐로 철저하게 격리시킴. 

집에서도 2주간 철저한 자가 격리 수칙을 지킨 가족들.

조선의 황당 대응 사례.

 워스트 3위는 태종 13년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심리적 위안은 되지 않았을까요?

워스트 2위

전염병 걸린 병사 격리를 지시한 광해군. 미온적인 대처로 화를 부른.

워스트 1위는 태조 6년.

태조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던 사례임.

조선의 베스트 전염병 대책은. 조선왕들이 한마음으로 실시한 세금감면정책.

베스트1 

사형수 인권까지 챙긴 정조.

사형수라도 병으로 죽어서는 안된다.

아무리 죄수라도 이들의 죄를 물어야지 전염병으로 죽게 둘수는 없다. 역시 남다른 정조의 인권의식.

최근 죄수를 석방하는 경우도 있고

코로나19 확산에 곳곳에서 재소자 석방 결정중.

반면 임시시설 수용뒤 재수감을 지시한 정조.

지금까지 살펴본 조선 전기의 전염병의 역사. 

조선 중기 최악의 전염병을 불러온 사건은?

조선 전기와 후기를 나누는 기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임. 참혹했던 전쟁과 맞물려 극심했던 조선 중기 전염병.

임진왜란하면 떠오르는 분. 

이순신 장군이 남긴 기록을 보면 전염병 피해의 정도를 짐작 가능함.

한꺼번에 피난을 떠났던 전쟁 상황. 식량부족에 영양부족까지.

전쟁이라는 상황이 전염병에 취약했던 시기.

선조실록에도 기독돼 있는 참상.

그 정도로 처참했던 상황.

실록기록뿐만 아니라

조선 중기 전염병 퀴즈.

말라리아의 옛말인 학질.

모기에 의해 전염되는 학질.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거의 다 걸리고 쇄미록 기록에 보면

학질에 걸렸던 오희문의 일가족. 모기에 의한 전염. 병원충을 가진 학질모기에 물리면 감염됨.

당시 어느정도 대책을 냈지만 모기장과 모기약이 없던 시기로

병이 발작하는 주기인 직.

주기적으로 수차례 증상이 발현. 말할수 없이 고통도 심했고 낫기도 어려웠던 병 학질.

학질에서 나온 유명한 말이 있어요. 학을떼다!!

심각하게 힘든 상황. 질리게 들러붙는 사람을 뿌리치면 학을뗐다는 표현을 사용하죠.

몹시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홍역을 치르다 라고하죠.

염병할 놈. 염병= 전염병을 말함.

염병의 다른 뜻은 장티푸스에요. 심한 저주를 퍼부을 때 사용하죠.


조만간 코로나를 뗐다는 말이 생겨날수도 있겠어요.

앞에서 임진왜란 얘기했는데 허준이라는 인물!

임진왜란 이후 전염병이 아주 심각하니까 1596년 의서 편찬 프로젝트를 진행한 선조.

어의 앙혜수, 이명원, 김응택, 정예남 등 의학 전문가 4인과 함께. 허준이 참여한 의서편찬 작업.

분담을 해야할것 아니에요. 그런데 다음해 발생한 정유재란.

1597년 왜군이 다시 조선을 쳐들어온 사건. 정유재란을 수습한뒤 다시 동의보감 편찬을 지시함.

이미 모두 흩어지고 허준 홀로 남은 상황. 게다가 1608년 선조가 승하함.

이번엔 유배를 가게된 허준. 하지만 광해에 의해 재등용되고 다시 편찬 작업을 이어간 허준.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

전염병 전문 서적도 쓴 허준.

역병을 막는 처방법을 적은 벽역신방,  새롭게 편찬한 온역을 막는 처방법인 신찬벽온방.

동의보감 완성 직후에 편찬해요. 조선시대 대표 전염병 중 하나인 온역.

봄철에 유행하는 급성 전염병은 시기별로 차이가 있어요.

온역을 전염시키는 매개체는?

이로 온역이 유행하냐면 면포 유통이 활발해졌던 16세기. 따뜻한 옷을 입을수 있게 됐는데

두창을 치료한 인물이 허준이에요.

1608년 천연두 구급 의서인 언해두창집요도 발간함.

두창= 천연두.

두창의 두가 원래 콩두에요. 콩알 같은 종기가 일어나는 병임.

고열과 함께 종기가 부풀고 고름이 난뒤 딱지가 생김.

천연적으로 생기는 두 그래서 천연두가 된거죠. 마마를 앓았다는 말도 하잖아요.

워낙 천연두가 두려우니까 극존칭까지 썼던 사람들.

마마배송굿

천연두에 걸린뒤 13일째 되는 날, 마마신을 공손하게 돌려보냈던 굿.

호구거리는 천연두신을 모셔서 병이 순조롭게 낫기를 빌었던 굿임.

19세기말 작품. 여기서도 확인되는 굿의 흔적.

병자호란 당시 직접 조선을 찾았던 홍타이지. 전염병의 공포에 급히 전쟁을 끝내고 귀국.

병자호란 당시 갑자기 협상을 서두른 청군. 결정적인 이유중 하나가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던 시점에 천연두가 창궐했던 것.

불안에 떨었던 홍타이지. 천연두 한번 앓고 나면 생기는 면역력.

면역력이 없었던 생신.

당시 홍타이지는 생신이었음.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의 굴욕으로 종식된 병자호란.

천연두가 큰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 전쟁에서 승리한 홍타이지.

세리머니를 해야 하는데 떠나기 바빴던 홍타이지.  전쟁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

전쟁까지 종식해버린 위엄.

총보다 무서웠던 천연두의 공포.

조선후기 최악의 전염병 시대가 열리다.

현종 재위 기간 중 13차례 전염병 발생. 숙종 시절의 인구의 20%가 사망.

조선을 집어 삼킨 전염병.

그 원인은 1670~1671년 경신대기근. 17세기 대기근이 찾아온 원인. 소빙하기.

전 세계를 강타한 이상기온 때문임. 기록에서 느껴지는 당시의 공포.

안타깝게도 현종시대를 보면 리더가 힘을 발휘할수 없었던 상황.

당쟁이 매우 심했던 시기. 왕실 장례때 상복 착용 기간을 놓고 서인과 남인이 치열하게 싸운 예송논쟁.

민생 챙기기는 뒷전임. 정쟁만 벌였던 시기로 또 한가지 이유는 건강이 좋지 못했던 현종.

리더가 건강하지 못하면 난국은 수습이 불가하죠. 현종 때는 불행하게도 그런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됐고

리더가 적절한 대응을 할수 없었던 시기에요.

현종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숙종. 재위기간이 1674~1720년임.

천연두와 정말 악연이 많아요. 숙종 재위 시절 왕실까지 덮친 천연두. 신하들과 대면 접촉을 피한 숙종.

조선판 재택근무를 지시하고 그렇게 조심을 해서 다행히 천연두를 피했던 숙종.

그런데 숙종의 첫번째 왕비 인경왕후가 천연두에 걸려 8일만에 사망.

경희궁에 거처하고 있었던 숙종. 창경궁으로 거처를 이동 그런데 1683년 23살에 본인이 직접 걸려요.

실록에 기록돼 있는 숙종의 병상일지.

대체적으로 천연두 발병부터 회복까지 약 12일이 소요되요.

회복후 마마자국이 남기도 했던 천연두. 

조선시대 초상화를 보면 쉽게 발견할수 있는 마마 자국.

22명중 5명 얼굴에서 발견할수 있음. 기록으로 전해져요.

왕의 초상화부터 민낯을 추구함. 건강상태도 확인 가능.

우리 시대의 사진을 연구하는 후손들은 헷갈릴까봐 걱정된다고..ㅋㅋ뽀샵처리해서.

또하나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해요.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 천연두 걸린 아들이 걱정이었는데

무당을 찾았던 명성왕후. 하지만 무당의 말을 따랐음. 이후 아들 숙종은 회복했지만. 한달만에 어머니 명성왕후가 승하함.

이게 역사적으로 보면 명상왕후의 승하가 불러온 나비효과.?!

숙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명성왕후에 의해 쫓겨났던 장희빈. 명성왕후가 장희빈을 알아본 거죠.

명성왕후 승하후 다시 입궁하죠. 훗날 왕비까지 오른 장희빈. 천연두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아는 장희빈이 없었을수도 있어요.

역사 곳곳에 남아있는 전염병의 흔적. 숙종 본인은 다행히 회복됐지만 두 아들도 천연두에 감염.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 숙빈 최씨의 아들 영조. 또 누가 걸리냐면 인경왕후 승하 후 장희빈의 라이벌로 유명했던.

인현왕후는 천연두에는 걸리지 않아요. 그런데 1701년 35ㅅ의 나이로 승하한 인현왕후.

인원왕후가 걸려요.

천연두와 숙종의 지독한 악연.

숙종을 치료한 인물이 천연두 전문가였던 유상.

숙종과 세자의 천연두를 치료한 공을 인정받고 시장, 군수에 해당하는 수령직을 제수받게됩니다.

유상의 후예가 되는 사람이 종두법을 개발한 지석영이에요.

19세기 조선을 공포에 떨게 한 또다른 전염병의 등장.

1821년 조선, 뙤약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사망한채 발견된 사람들.

이들의 옆집과 그 옆집 마을 전체로 퍼지기 시작한 증상. 호랑이가 살을 찢는 것과 같은 고통.

시신들로 뒤덮이고만 조선의 거리.

열흘동안 발생한 사망자 1000명.

참혹한 질병의 정체는 과연?

19세기 조선을 침략한 전염병. 콜레라!! 콜레라는 병이 생기면 호랑이가 사지를 찢듯이 아프다.

콜레라가 호열자로 불린 배경은?

우리나라에서는 랄을 자로 읽기 시작. 자에 찌를 자가 있는거에요.

그래서 호열자가 된거에요.

발뒤꿈치 근육 경련을 유발해 쥐통으로도 불린 콜레라.

쥐 귀신이 일으킨다고 믿었던 쥐통.

지금의 예방수칙과 유사한 지침.

이때도 일단 해항검역을 강화해요.

전염병 환자를 격리 수용하는 피병원을 설립.

그리고 1885년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

제중원의 의료 선교사 에비슨은 손 씻기를 강조.

왕들의 노력과 의학의 발전으로 점차 극복돼 온 전염병.

오늘 조선의 시대별로 전염병의 역사와 대응법을 살펴본 시간.

지금과도 유사한 방역체계를 가동하고 백성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던 조선의 왕들.

옛날이야기 같지만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는 상황들. 전염병 대응도 예외는 아닙니다.

다행히 코로나를 슬기롭게 극복해 가고 있는 대한민국.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K-방역.

" 우리도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코로나 극복의 역사. 훗날 후손들이 2020년대를 돌아보며 이렇게 극복하고 노력했구나.

후손들이 위기를 극복할 힘을 주는 것.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책무가 아닐까요?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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