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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차이나는 클라스 구수정, 기억해달라 베트남전쟁

by 로토루아8 2018.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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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4 - [정보] - 차이나는 클라스, 베트남 전쟁을 아시나요? 구수정 박사


베트남 전쟁이 두나라에 입힌 상처는? 베트남 하살의 도화선이 된 건 구정공세에요.

음력 1월1일이면 약 10일동안 구정 연휴를 보내는 베트남은  이 연휴기간은 전쟁을 할때도

일시적인 휴전상태에 돌입했어요. 그런데 1968년은 달랐던 거에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해방전선을 미군 주요 시설을 급습한다.

당황한 미군은 힘겹게 이 공세를 막아냈고 이 모습이 미국에 생중계되자 반전 운동은 더욱 거세졌어요.

가장 놀랐던건 미군임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던 분위기에서 갑작스러운 게릴라들의 공격으로

안팎으로 초조해진 미국..

구정공세 이후 더욱 잔혹해진 전쟁의 양상

밀라이 학살(선미학살)은 1968년 3월 16일 미군이 밀라이 지역의 민간인 504명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함

함께 싸우고 있던 한국군의 작전 양상도 더 잔혹해 질수밖에 없었죠

다낭을 중심으로 한 시간 거리 내에 굉장히 많은 한국군 학살이 있어요.

다낭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음 퐁니 퐁넛 학살이 일어나던 날은

1968년 음력 1월 14일  

1월 15일 정월대보름 하루전날로 뗏 응웬 띠에우라고 베트남의 큰 명절 중 하나에요.

이 학살 이후로 자신들의 큰 명절을 이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큰 명절을 잃었죠

한날한시 온 마을에서 시작되는 제사 그날 이마을에 무슨일이 있던걸까요?

앞서가던 탱크가 뒤집어지면서 한국군 한명이 부상을 입게되요.

1번 국도 옆 마을을 공격함 이 공격으로 마을 주민 74명이 희생당함

약 한시간쯤 지났을때 인근초소 총소리에 마을로 들어온 미군들


자신이 겪은 전쟁의 참상을 기록함 상황이 허락될때마다 카메라를 들고다닌 본 상병

당시 19살이었던 소녀인데 발가벗겨지고 한쪽 가슴이 도려진채 발견됨

이 소녀는 사진을 찍을때까지 살아있었다고해요. 이 소녀가 죽기전 남긴말이

어떤 생각을 했냐면 일련번호로만 남은 이 소녀의 이름을 찾고 싶다

그래서 2000년도에 사진을 들고 마을로 찾아간 선생님

가서 이 여성을 물어보는데 쉽게 되새길수 없는 옛 기억들로 특별한 사건이 없다면 힘든일이죠.

이름을 묻기 위해 실낱같은 희망으로 찾아간 마을에서 소녀의 이름은 응우옌 티탄

전쟁이 아니었다면 학교에 다닐 나이고 

전쟁통에 폭격이 떨어지는데 외모에 한창 관심이 많을 꽃다운 나이인 응우예 티탄은 손재주가

특별히 좋았던 하얀 아오자이 소녀로 기억되고 있더라고요. 이런 얘기들을 마을 분들이 들려줬음

많은 시간이 지나도 그녀를 잊을수 없었떤 마을 사람들..

폭풍전야라고 아시나요?

학살이 있던 날 아침 왠지 모르게 고요했던 하늘

때마침 장을 보러간 몇몇 마을 사람들 전쟁통에 마을에만 있기가 답답했던 아이는

엄마를 따라서 마을을 나섰는데.. 총을 쏘며 마을로 들어온 한국군들 뒤돌아 마을로 뛰어온 득 할머니

총알이 날아오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고  어느새 놓쳐버린 아이의 손..

스스로를 용서할수 없었던 어머니의 마음...

이제는 90세로 나이를 먹어 치매에 걸렸는데 

이제 자식 생각 안하겠네.." 라며 가족들이 좋아한다고

1968년 음력 1월 14일 그날에 시간이 멈춰진 채

평생을 죄책감에 휩싸여 살아야 했던 득 할머니..

주민들이 베트콩을 지원한다고 생각했기때문이라고해요. 양민중 한명은 베트콩있을것이라고


베트콩 입장에서 한국군과 전장에서 만나면

그들이 말한 한국군들의 단점은? 동료가 죽었을때

전우를 잃었던 그 슬픔이 광기로 변해 무차별한 공격을 했을지도..

이유는 학살마다 다 달라요. 이말은 자료가 사실이라면 보복성 학살로 추정됨

도다른 한국군 학살지역은 꽝남성 하미마을이에요.

베트남 측의 자료를 보면 미국에 의해 전략촌에 수용되어 있던 하미 마을 주민들이

한국군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는데

30여가구 전략촌에 남은 주민들이 마을로 복귀를했고 처음엔 한국군들하고 친하게 지냈대요

실제 전략촌 주민들의 재정착을 도운 한국군들

1968년 음력 1월 24일 미국의 영향으로 구정공세 직후 달라진 한국군의 전투양상

학살당일 마을 주민들을 불러모은 한국군들 

주민들은 별다른 의심없이 나갔죠  그만큼 사이가 좋았던 한국군과 주민들.. 하지만 한국군들은 평소와 달랐다고

두시간마에 135명의 주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함

다음날 다시 마을을 찾은 한국군들

다른 마을의 경우 학살이 일어난 장소에 주민들이 위령비를 세움

베트남 사람들이 지은게 아니에요. 한국의 참전군인 모임에서 2000년에 희생된 전우와 주민들을 위해

위령비를 건립함 베트남 위령비의 특징이 죽은이들의 이름을 위령비에 기록해놓는데

신생아까지 학살에 희생됐던..

처음에 봤을때는 이름만 눈에 들어왔었는데

성이 원이라는 응우옌이고 보잔의 의미는?


보잔이란 아무개, 무명이라는 뜻이라고해요.

태어나자마자 이름도 없이 죽어야 했던 생명들...

우리로 치면 개똥이 같은 이름이라고해요.

전쟁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아기들 죽지말라는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이름

희생자 절반 이상이 어린아이에요.

어떤 명분으로도 이해할수 없는 일이죠

한국 사람들이 화해를 청하니 이 비석을 세우니 아름다운 미래로 나아가자

이 비문이 불편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고

우리 대사관의 한 외교관이 위령비를 지원한 단체에 연락해서 참전 군인 단체에서 마을에 비문 수정을 요구함

" 우리가 직접 겪은 과거를 한 글자도 고칠수 없다"

베트남 정부 역시 마을에 등을 돌린 현실..

이제 마을 사람들이 큰일이 난거죠 유가족 협의회인 하미 마을을 지키던 유가족 단체는

유족회에서 다급히 전화가 온거에요.

내용을 못알아들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던 유족..

한걸음에 마을을 찾은 선생님 마을의 주민 회의가 계속 열렸는데

유가족의 대표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주민들이 위령비 앞에서서 증인이 되어 달라는 요청..

고함을 치듯 첫번째 던진 질문이

" 네 비문이 있습니다.:

" 우리는 단 한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비문을 없애지 않을 것이다.

비문을 그대로 둔 채 대리석으로 비문을 가린 주민들

머지않은 미래에 한국이 다시 열어주길 바라는 마음

꼭 다시 비문을 열겟다는 의지

1990년대 후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최초로 공개한 당시

당시 한국은 김대중 정구너이 집권했던 시절로 1998년 베트남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

한국 대통령 최초로 베트남 전쟁을 언급함

베트남에 5개의 병원과 40여개의 학교 건립을 약속했다고


정부보다 민간단체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중이라고..

실제로 공신력있고 법조계등 저명한 인사로 꾸려진 재판부

김영란법 그분이라고하네용...ㅎㅎ 사실 경제 정치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김영란 전 대법관이름이라니.... 다시 공부해봐야겟어요.

피고= 대한민국이고  풍니, 하미마을 학살에서 생존한 두 피해자가

한국에와서 원고석에 앉았죠.

2018년 4월 무거운 분위기에서 열린 시민 평화 법정

베트남 민간인 학살의 진상규멍을 촉구함

모의재판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준 재판부 모의재판이 법적 효력은 없지만

이 재판의 판결이 주는 의미는?

이 재판과정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과 그리고 판결을 들은 방청객들..

이들이 진실의 증언자가 되어줄 것.

진실이 또 다른 힘을 가질 때 많은 한국인들이 함께 변하지 않을까...

법정에서 베트남전 피해자들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가



<출처: jtbc  차이나는 클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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